컵 보증금제가 정말 중요하니까! 경향신문에 쓴 칼럼을 공유드립니다. (2023.5.26)
"좋은 상사는 중요하다. 스웨덴 남성 3122명을 10년간 추적한 결과 훌륭한 상사 밑에서 일한 경우 심장발작에 걸릴 확률이 20% 줄어들었다고 한다. 말단사원 시절 나는 이런 문구에 밑줄을 그어가며 상사를 훔쳐보곤 했다. 나의 심장발작권을 거머쥐고 있을 당신이여(화르륵).
이젠 직장에서 다른 누군가의 심장을 벌렁거리게 할 상사가 돼버린 나는 직장보다 더 큰 사회의 상사를 떠올린다. 내 직업인 ‘쓰레기’ 업무를 좌지우지하는 자원순환 정책이 바로 나의 상사쯤 된다. 자원순환 정책이 엎어지면 내 심장도 쿵쿵 뛴다. 요즘 내 상사는 좀 문제적이다. 수많은 시민들의 발품을 팔아 ‘플라스틱 어택’을 진행하고 작은 승리를 거둔 순간 그가 등장한다. 나쁜 상사의 취미이자 특징은 뒤늦게 나타나 다 된 일의 방향을 틀어버리거나 미주알고주알 간섭하는 ‘마이크로매니징’을 통해 일을 망친다는 것이다.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.
‘플라스틱 어택’의 가장 큰 성과는 묶음포장을 법으로 금지한 것이었다. 그러나 정작 거대한 포장지가 나오는 라면은 쏙 빠졌다. 묶음포장 금지는 3개까지만 적용된다. ‘4+1’을 한데 묶어놓은 라면 봉지는 해당사항 없음이다. 묶음포장 종류 중 큰 비율을 차지하는 농산물도 제외됐다. 다 못 먹어도 가지 4개, 오이 5개씩 묶어 판매하니 무조건 많이 사야 한다.
비슷한 예로 유해물질 우려가 있고 재활용도 안 되는 나쁜 플라스틱 PVC가 있다. 줄기찬 문제 제기로 PVC 포장지가 금지되었다고 환호했으나 너무 이른 김칫국이었다. 중국집 짜장면, 떡집 떡, 채소가게 버섯 등을 투명하게 싸고 있던 PVC 랩도 사라질 줄 알았다. 그러나 국내 PVC 사용량은 크게 줄지 않았고 중국집, 떡집, 시장과 마트에서는 여전히 PVC 랩을 쉽게 볼 수 있다. 법에서 금지했으나 육류 포장이나 연 매출 10억원 미만의 경우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. 동네 시장이나 마트에서 연 매출 10억원 이상이면 ‘서민 갑부’ 수준 아닌가? 실제 전체 랩 사용량의 90% 정도가 PVC 금지 조항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. 이쯤 되면 심장이 움찔한다.
최고봉은 지난해에 시행될 예정이었던 일회용 컵 보증금제를 6개월 연기하다가 세종과 제주에만 시행한 것이다. 정작 일회용 카페 컵 사용량이 가장 많은 수도권을 빼버렸다. 두 지역의 카페는 애꿎은 우리한테만 왜 이러냐며 제도를 보이콧하기 시작했다. 보증금제는 일회용품을 회수해 재사용하거나 재활용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.
캔, 페트병 등 거의 모든 음료 용기에 보증금을 적용한 덴마크의 경우 빈 용기 회수율이 90%나 된다. 이런 상황에서 제주도가 나섰다. 조례를 개정해 규모가 큰 모든 카페에 보증금제를 적용하고, 재활용 도움센터처럼 공공장소에서 일회용 컵 회수를 하는 등 카페를 지원한다. 그래도 보증금제를 어길 경우 카페를 단속하고 과태료를 부과하겠다고 밝혔다.
우리 ‘쓰레기 덕후’들은 6월 첫째 주 제주도로 떠난다. 공항에서 일회용 컵 보증금제를 알리고, 해변에서 카페 컵을 주워 반납하고, 제주도의 개정안을 응원하기 위해서다. 못난 상사만 탓하기에는 내 심장과 쓰레기는 중요하고 컵 줍기를 하면 심장 건강에도 좋겠지. 재활용률 5%도 안 되는 일회용 카페 컵의 변화가 제주도에 달려 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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